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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란열사 21주기 묘소참배

일시 : 2023326() 오전 11

장소 : 벽제중앙추모공원

❏ 주최 :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빈곤사회연대

*문의 : 빈곤사회연대 02-778-4017 / 010-7797-8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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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란, 1966년에 태어난 그녀에게 어릴 적 뇌성마비 장애가 찾아왔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의가 컸지만, 장애와 가난은 그녀의 꿈을 가로막았습니다. 18세에 독립해 성린직업재활원에 입소한 후 작은예수회, 명휘원을 거쳐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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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학력고사(준비)를 시작하였다. 하루에 4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장애인 모임(울림터)에 나갔다. 그 모임은 이 땅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장애인을 위해 토론도 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을 했다. 이 모임에 나가면서 우리나라 복지가 열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옥란, 재판장님께,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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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불어 닥친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사회변화의 물결은 최옥란에게도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87년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에 가입한 최옥란은 88년 동생과 연신내 시장 인근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며,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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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인의 아픔을 어떻게 표현할까” -1990111, 최옥란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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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터에서 장애인운동 활동가로 의식을 깨친 최옥란은 뇌성마비연구회 바롬의 창립멤버로 함께합니다. 뇌성마비 장애인이 겪는 고유한 문제를 풀어내야겠다는 그녀의 다짐은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유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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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이혼 후 최옥란은 본격적으로 생계를 찾아 나섭니다. 노점상 최정환 열사의 분신 항거 후 꾸려진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회원으로 청계천8가 삼일아파트 17동 근처에서 최옥란은 노점을 시작합니다. 노점상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일 단속과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주변 노점상들은 그녀를 악바리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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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된 후 최옥란은 수급자가 되었습니다. 몸이 안 좋아져서 노점을 포기하고 했던 선택이었지만 2001년 그녀가 받는 한 달 수급비는 단돈 28만 원, 인간답게 살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그녀는 한 달 수급비를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반납하고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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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정부의 선전과 달리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빈곤계층 단 한 명의 최저생계도 보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존권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단기자회견, 20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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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라는 최저생계비는 그녀를 건강하고 문화적으로 살 수 없게 했습니다. 주변 수급자들 역시 같은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사실과 이를 함께 바꿔나가고자 하는 용기가 그녀를 명동성당 농성에 나서도록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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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렇게 명동성당에서 그것도 추운 겨울에 텐트 농성을 결심한 이유는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비단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부터입니다. 많은 수급자가 그리고 차상위계층이 말도 안 되는 제도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은 저에게 한편으로 힘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최옥란, 명동성당 농성에 들어가며, 20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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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을 마친 이듬해 봄, 음독자살을 기도한 그녀는 결국 2002326일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가 시작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개정 투쟁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기만성을 폭로했고,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투쟁을 비롯한 기초법 개정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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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란은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제2, 3의 최옥란들은 그녀의 투쟁에 함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