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자 회 견 문>

 

장애인 빈민 탄압 속에 사라져간, 열사는 말한다

19957월 이덕인은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회원으로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장애인 차별과 빈곤의 억압 속에서 장애빈민 생존권을 위해 나선 그에게 곧바로 닥친 것은 단속 위협과 강제 철거였다. 인천시와 연수구는 비리와 폭력으로 악명 높은 용역업체 무창을 철거업체로 선정하고 막대한 예산을 투여해 노점철거에 나섰다. 19951124일 노점철거를 위해 수천의 군, , 소방, 용역업체의 합동 철거작전이 시작되었다. 아암도 노점상들은 고립된 망루에 올라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농성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튿날 물이 빠진 바닷길로 탈출을 시도한 이덕인이 사라졌다. 장애빈민에 대한 폭력철거과정에서 그는 사라졌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덕인 죽음의 책임을 낱낱이 조사해야 한다

사흘 뒤, 이덕인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상의가 벗겨진 채, 양손은 포승줄에 결박된 상태로 눈을 부릅뜬 그의 시신은 폭력의 증거 자체였다. 경찰은 영안실에 난입해 그의 시신을 탈취해 강제부검하고 죽음의 진상을 서둘러 덮으려 했다. 당시 철거작전을 지시하고 수행한 인천시와 연수구, 경찰, , 용역 그 누구 하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죽음의 진실을 알기 위해 그의 부모는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했고, 장례 이후에도, 25년간 거리를 헤매야 했다. 그 한 맺힌 세월은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이덕인의 죽음의 책임은 과연 그 누가 지고 있는 것인가.

 

25년 세월, 이덕인과 그 가족의 한을 풀자

이덕인의 죽음은 문민정부, 민선 1기 인천광역시장이 집권한 당시 벌어진 일이다. 당시 인천은 세계로 뻗어 나갈 희망으로 선전된 개발이 곳곳에서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단속과 철거의 대상일 뿐이었다. 정권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의 죽음의 진실은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 없다. 2002년 김대중정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이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였으나,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 보상심의신청은 모두 기각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한 사망인지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조사개시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2010년 위원회 해산 이후 안타까운 시간만 흘렀다.

 

과거사위원회는 이덕인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에 나서라

오랜 세월이 지나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이 재개될 예정이다. 25년 한 맺힌 세월을 보내야 했던 그의 노부모와 가족을 위해서라도, 스물여덟 청년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몬 진상을 이제라도 밝혀야 한다. 또한 장애인, 빈민을 위해 투쟁한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반드시 명예회복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25년 전과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의 진실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가난한 사람을 폭력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권력의 오만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덕인 열사 죽음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은 우리가 살아갈 시대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

하나, 과거사위원회는 이덕인 열사의 죽음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라

하나, 이덕인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자는 열사의 가족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

하나, 정부는 장애빈민 생존을 위해 희생한 이덕인의 명예회복과 국가배상 실시하라

 

 

 

20201126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25주기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