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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5일 청와대 앞,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위한 특별 예산 편성 요구 기자회견]
아래는 홈리스행동 안형진 상임활동가 발언 전문입니다.
 
작년 요맘때 쯤, 젊은 여성홈리스를 만나 수급신청을 함께 진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분에게 발언 요청을 했지만, 당시 상황을 복기하고 싶지 않다며 제게 발언을 위임하셨습니다. 당시의 기록을 참조하며 발언 이어가겠습니다.

10대일 때 소위 ‘가출 청소년’이라 분류되고 호명됐던 그이는 20대의 대부분을 거리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삶을 지속하기가 너무 어려워, 10년 전 관계를 맺었던 청소년 운동단체를 통해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수급신청을 하려면 주소지가 있어야 하기에, 노숙인 지원체계를 통해 방을 먼저 얻었습니다. 그리고 기초수급을 신청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오래 전 개가하셨기에 수급 선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해서는, 주민센터에서 수급이 불가하다는 얘길 들었다고 했습니다. 수 년 전, 약 3개월 정도를 개가한 어머니 집에서 산 기록이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녀가 왜 그 집에서 나와 또 다시 24시간 찜질방, 24시간 패스트푸드점, 24시간 영화관을 전전해야만 했는지 행정기관은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3개월 동안 ‘부양의무자’와 함께 산 적이 있었으니 관계 ‘단절’ 내지 ‘해체’라 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담당 공무원은 가족관계 해체 사유서를 쓸 때 왜 해당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냐며, 외려 당사자를 질책했습니다. 노숙인 자활시설에 입소했던 기록까지 내밀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알다시피 가족관계라고 하는 것이 항상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사회적 관계의 본질도 아닙니다. 특히, 극빈의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게 가족관계는 취약하고 위험하며 심지어 착취적인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흔히들 부양의무자 기준이 빈곤을 가족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의 책임으로 넘겨진 빈곤은, 다시금 가족관계 안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의 몫으로 남겨지곤 하기 때문입니다.

거리노숙 현장에서 수급상담을 할 때, 저는 늘 난처합니다. “부모님 살아계셔요?” “자식은 있으세요” 이 따위 질문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1년, 2년, 3년을 거리에서 생활해 온 사람임을 모르지 않음에도 이따위 질문이나 늘어놓아야 하는 상황이 과연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질문을 하는 저도 곤혹스러운데 당사자는 오죽하겠습니까.

기초법 시행 이후, 부양의무자 기준이 계속 축소돼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홈리스 당사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이 있어서 수급이 안 된다, 누님이 있어서 안 된다, 심지어는 삼촌이 살아계셔서 안 된다. 부양의무자 기준이 폐지된 주거급여를 신청하라는 말에도 당사자 분들은 이리 말합니다. 부양의무자 기준의 존재 자체가, 가족관계로 철저히 얽힐 것을 강제하는 바로 그 기준 자체가, 공공부조를 절실히 요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를 낳고 있는지부터 복지부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부양의무자 기준이라는 제도를 가지고서 가난을 규율하려 들지 마십시오. 더 이상, 취약하고 착취적인 관계에 놓인 사람 앞에서 ‘사회적 합의’ 운운 마십시오. 그 사회적 합의라는 말, 취약한 사람을 홈리스 상태로 밀어넣는 일자리정책, 고용정책, 가족정책을 밀어붙일 땐 왜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분명히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옛날이야기 들어 보면, 악마도 자신이 한 약속과 계약은 지킨다 했습니다. 약속,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면 폐지, 꼭 약속 지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