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없는 세상을 위한 기억, 그리고 행동
발굴이 아니라 정책과 제도 개선, 공공성 강화를 요구한다.
“죄송하다”는 편지,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송파 세 모녀’의 죽음으로부터 9년이 지났지만 가난한 이들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작년 수원 세 모녀와 신촌 모녀에 이어 지난 1월 밀린 월세를 보증금에서 처리해 달라며, “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편지를 남기고 떠난 성남 세 모녀, 그리고 조용히 스러져간 많은 이들,
우리는 가난 때문에 세상을 떠난 이들을 추모하며,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이 ‘빚이 많아서’, ‘살기 힘들다’, ‘미안하다’는 유서, 체납고지서와 함께 죽음으로 발견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당장의 변화가 필요하다. 잘못된 진단과 대책을 반복하는 정부와 국회에 책임을 물으며, 빈곤층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모든 변화를 실시할 것을 촉구한다.
발굴이 아니라 정책과 제도 개선
가난한 이들의 죽음이 알려질 때마다 정부는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 ‘발굴’하겠다는 대책을 반복한다. 성남 모녀의 죽음 앞에도 ‘주소지 이전’과 ‘체납 경험 없음’을 언급하며 기존 39종의 정보를 44종까지 늘리겠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가난한 이들이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서’, ‘복지제도를 찾지 않아서’ 그리고 사회복지노동자들이 제대로 ‘발굴하지 않아서’라는 왜곡을 만들어낸다. 실제 소득이 감소하거나 중단된 상태에서 주민센터를 찾은 이들은 복지제도의 엄격한 선정기준에 의해 ‘당신은 아직 가난하지 않다’는 안내에 좌절하며 걸음을 돌린다. 가족 때문에, 근로능력이 있어서, 비정기적 소득이나 처분이 안되는 재산 때문에 사회보장제도에서 밀려난 이들은 여러 차례 ‘발굴’되지만 ‘이용할 수 있는 제도가 없다’는 안내를 반복해서 받는 모욕을 경험한다. 발굴 당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용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가 없다. 이는 사회보장급여법이 실시된 이후 복지부에서 취합해 온 통계에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자료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위기 가구로 발굴된 133만9,000명 중 공적 서비스로 연계된 이는 16만5,000명으로 12%,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기초생활보장제도로 연결된 이는 2만8,000명으로 4%에 불과하다. 위기상황에서 국가라는 선택지가 부재했기에 약탈적 금융을 이용하고, 더 큰 위기 상황을 마주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는 정책과 제도의 부재로 발생하는 문제를 가난한 이들과 사회복지 노동자들에게 책임 떠넘기는 무책임과 기만을 중단해야 한다. 특히나 올해는 제3차 기초생활보장종합계획을 수립하는 해이다. 실제 빈곤에 빠진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로, 사회보장제도를 이용하는 이들이 차별이 아니라 환영을 경험할 수 있는 변화를 위한 논의와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사회정책의 총체적인 변화, 사회 공공성 강화
빈곤문제는 복지제도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가난한 이들이 죽음으로 발견된 순간의 단면이 아니라 그들 삶의 경로에서 일상을 위협하고 빈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들을 제거해 나가기 위한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코로나19로 인한 불평등한 위기의 여파가 지속되고, 러우전쟁 등 세계정세로 인한 고물가와 고유가에 이어 공공요금이 가파르게 인상되는 상황에서 임금과 복지급여 수준은 실질적으로 후퇴했다. 한국 80여개 사회보장제도의 선정기준이자 생계급여 보장수준에 사용되는 기준중위소득은 전체 국민 소득의 중위값을 의미하지만 2023년 기준중위소득은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0년 소득의 중위값 보다 낮다. 위기를 마주했을 때 이용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의 부재, 불안정노동의 확산, 낮은 임금과 쉬운 해고, 사회복지를 포함한 공공시스템의 시장화를 통해 이윤은 사유화되고 위기가 사회화되는 사회에서 빈곤과 불평등은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사회보장제도의 개선과 예산 확충 없는 ‘발굴’은 가난한 이들의 입장에서 찾아오는 절망에 불과하다. 시장화된 사회복지는 사람보다 이윤을 우선으로 하며 공공성을 후퇴시키고, 가난한 이들의 일상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일상을 더 심각하게 위협한다. 지난주 발달장애가 있는 30대 남성이 화마에 휩쓸려 사망했다. 장애가 있는 이들이, 고시원 거주자들이 불이 난 공간에서 대피하지 못해 사망하는 비극을 언제까지 방치할 셈인가.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권리에서 출발하는 사회보장을 요구한다. 돈과 사람의 생명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저울질하는 폭력을 거부하며 모두의 존엄을 위한 변화, 공공성 강화를 요구한다. 기준중위소득과 사회복지급여 현실화와 부양의무자기준 완전폐지, 근로능력평가 폐지를 비롯해 주거권과 노동권, 사회보장의 권리를 강화해야 한다. 이로부터 빈곤을 해소하는 것을 넘어서 빈곤을 발생시키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빈곤에 빠진 이들이 죽음으로 발견되는 사회에선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현재 가난한 이들의 인권과 평화가 우리 모두의 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송파 세 모녀 9주기를 맞아 다시 한번 다짐하며, 권리에 기반한 정책과 제도의 변화, 사회공공성 강화를 요구한다.
가난 때문에 스러져간 모든 이들의 영면을 빕니다.
2023년 2월 24일
송파 세 모녀 9주기 추모제 참가자 일동